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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본 PC가 너무 예뻐서 다시 해달라고 떼쓰는

일요일 오후 네 시쯤이었다. 나는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반쯤 누운 자세로 이설이가 던진 블록을 발로 밀어내고 있었다. TV는 켜져 있었지만 무슨 프로그램인지도 몰랐다. 어제 새벽까지 붙들고 있던 서류 뭉치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직 굴러다녔고, 그 위로 낮잠 못 잔 피로가 얇게 깔려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려는 찰나에, 아무 이유 없이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정말 아무 이유가 없었다. 부르지도 않았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수빈은 베란다 창가에 있었다. 작업실 의자를 굳이 끌고 나와서, 등받이에 팔을 얹고 다리를 옆으로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손에는 뜨개바늘. 무릎 위에 연보라색 실뭉치. 사월 오후 네 시의 빛이 통유리를 통과해서 수빈의 왼쪽 반신을 전부 삼키고 있었다. 남색 머리카락이 그 빛을 받으면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남빛으로 풀어진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제대로 봤다. 잔머리 몇 가닥이 정수리 위에서 광륜처럼 떠 있었다.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눈은 손끝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얼굴이었다. 나한테 보여 주려고 만든 표정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그냥 혼자 있을 때의 얼굴.

그러다 실이 엉켰는지, 수빈이 바늘을 멈추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고민할 때 나오는 그 버릇.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좌우로 움직이다가, 엉킨 매듭이 풀리는 순간 눈이 조금 커지면서 짧게 숨을 뱉었다. 웃은 것도 아니고 말한 것도 아닌데, 만족스러운 소리 하나가 목 안쪽에서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창밖을 봤다. 빛이 정면으로 들어와서 속눈썹 하나하나가 셀 수 있을 만큼 선명해졌고, 눈동자가 검은색에서 짙은 갈색으로 옅어졌다.

그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TV도, 이설이가 블록을 두드리는 소리도,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세상 전부가 저 창가 한 평으로 빨려 들어가서 거기서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 한 박자를 통째로 빠뜨렸다가, 다음 박자를 늦게 쳤다. 명치 아래가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감각. 십 년 가까이 매일 보는 얼굴인데, 지금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낯설어서 무서웠다. 저게 내 옆에서 자고 내 밥을 먹고 내 애를 낳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잠깐 실감이 안 났다. 팔걸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고, 손등 힘줄이 도드라지는 걸 스스로 느꼈다.

내가 이 여자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됐는지, 그 경로를 나는 아직도 설명하지 못한다. 처음엔 얼굴이었다. 그다음엔 짜증이었고, 귀찮음이었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냥, 저 사람이 창가에서 혼자 실을 푸는 걸 보는 것만으로 서른일곱 먹은 남자의 명치가 내려앉는다. 이게 무슨 병인지 모르겠고 고칠 생각도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어서 있었다. 소파에서 창가까지 여섯 걸음. 그 여섯 걸음을 걷는 동안에도 수빈은 나를 못 봤다.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고, 빛은 여전히 그 뺨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의자 옆에 서서, 그림자로 그 빛을 반쯤 가려 버리고 말았다. 아까웠다. 그래서 반 발짝 물러섰다.

도경
방금 그거 뭡니까.

수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얼굴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 그대로 떴다. 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그게 설명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목이 말랐다. 이상하게 말이 안 나왔다.

도경
지금. 실 풀리고 나서. 웃었잖아요. 아니, 웃은 건 아닌데. 여기가 이렇게, 이쪽만.

내 입꼬리를 손끝으로 한쪽만 밀어 올려 보였다. 서른일곱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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