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네 시. 나는 거실 소파 끝에 늘어져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총기 손질은 이미 끝냈고, 담배는 두 시간 전에 마지막 한 개비를 태웠고, 창밖은 가을 특유의 늦은 햇빛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이런 시간엔 보통 머릿속이 텅 빈다. 오 년간 익숙해진 상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급하지 않은, 일종의 안락한 무감각.
수빈이는 베란다 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러그 위에 다리를 접고, 무릎 위에 뜨개 바늘을 올려두고, 새로 산 회색 털실 뭉치를 굴려가면서. 그 털실은 내가 사 온 거였다. 정확히는 지난주에 내가 오일 얼룩을 남긴 목도리의 배상금 조로 시내 공방까지 가서 직원한테 색깔 샘플 스무 개를 들이밀며 고른 물건이었고, 그 사실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티 내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린 건 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시선을 둘 데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
햇빛이 각도를 바꿨다.
베란다 유리를 통과한 빛이 정확히 그 사람의 옆얼굴에 얹혔다. 애쉬퍼플 머리카락 끝이 투명해지면서 보라색이 아니라 거의 은색에 가깝게 반짝였고, 흰 피부 위로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떨어졌다. 수빈이는 바늘 하나를 입에 살짝 물고 있었다. 코를 세다가 놓친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왼쪽으로 삐뚤어졌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 그러다 답을 찾았는지 혼자 픽, 하고 웃었다. 소리도 없이, 누구 들으라고 지은 것도 아닌, 완전히 혼자만의 웃음이었다.
그 순간 세상의 소리가 꺼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음도, 바깥 도로에서 올라오던 차 소리도, 내 심장이 뛰는 소리조차 한 박자 늦게 들렸다. 명치 안쪽이 쿵, 하고 아래로 꺼졌다. 통증에 가까웠다. 나는 숨을 들이켜다 말고 멈췄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담배가 없어서 떨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건 그 떨림이랑 결이 달랐다. 더 뜨겁고 더 조용했다.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먼저 떠올랐고, 나는 그걸 지우려다 실패했다. 예쁜 건 원래 알고 있었다. 첫 만남 때 폐허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부터 알았다. 그런데 그건 정보로서의 예쁨이었고, 지금 이건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저 사람은 지금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나한테 보여주려고 웃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안 볼 때의 얼굴. 무방비한 얼굴. 근데 그게 왜 하필 나한테 들켰을까.
왜 심장이 내려앉았는지 생각해봤다. 일차적으로는 그냥 예뻐서. 그런데 그 밑을 파보면 다른 게 있었다. 저 사람이 나 없이도 저렇게 혼자 웃을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없어도 저 사람의 오후는 저렇게 반짝거린다는 것. 나는 그게 안심되면서 동시에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저 사람 없이는 오후가 없어진 인간이 됐는데, 저쪽은 아직 스스로 온전하다. 그 비대칭이 명치를 눌렀다. 근데 그 비대칭조차 좋았다. 저 사람이 온전해서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질투와 안도를 동시에 하는 이상한 인간이 된 거였다. 오 년간 아무것도 느끼지 않던 놈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일어난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러그 앞까지 가 있었고,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사람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털실 뭉치 하나가 내 무릎에 밀려 데굴 굴러갔다.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상대는 바늘을 입에서 빼고 눈을 깜빡였다. 완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내가 봐도 앞뒤가 없는 질문이었다. 근데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방금 네가 지은 그 얼굴 때문에 내 세계가 오 초쯤 정지했다는 걸 어떻게 문장으로 만드나.
나는 한 뼘 더 다가갔다. 홍차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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