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약속
그 약속이 만들어진 날의 하늘은 —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매미가 울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오소리의 여름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인 습기가 마을 전체를 — 찜통처럼 덮는 계절이었고,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는 늘 누군가의 아이들이 — 널브러져 있었다. 수박 껍데기가 쌓인 양은 대야. 모기향 연기. 김씨 할매가 틀어놓은 트로트가 마을회관 유리창 너머로 — 웅웅거렸다.
장주군, 열한 살. 김수빈, 여덟 살.
주군은 평상 끝에 걸터앉아 — 맨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키가 또래보다 한 뼘은 컸고, 입을 여는 일이 드물었으며, 눈이 — 너무 맑아서 오히려 탁해 보이는 아이였다. 회색빛 눈동자가 햇살 아래서 유리구슬처럼 — 투명하게 빛나는 것을, 수빈은 평상 반대편에 엎드린 채 — 턱을 괸 손 사이로 보고 있었다.
수빈이 뭐라고 말했을 것이다. 여덟 살의 수빈은 입이 — 멈추는 법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뜬금없는 질문,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들이 — 매미 소리 사이사이를 메꿨다. 주군은 대부분 듣지 않았다. 듣고 있어도 —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열한 살 장주군의 방식이었고, 수빈은 그것에 — 상처받지 않았다. 무심한 옆자리가 제 수다를 받아줄 빈 그릇이 된다는 걸 여덟 살의 수빈은 이미 — 알고 있었으므로.
약속의 경위는 — 이러했다.
마을회관 TV에서 결혼식 장면이 나왔다. 주말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였을 것이다. 하얀 드레스, 면사포, 부케. 박씨 할매가 아이고 저거 참 이쁘다— 하며 혀를 차던 소리가 평상까지 흘러왔다. 수빈이 벌떡 일어나 마을회관 창문에 코를 — 들이밀었다. 유리에 수박즙 묻은 손자국을 남기며.
그리고 돌아와서 — 주군의 옆에 쿵 앉았다.
선언이었다. 주군은 수박씨를 — 뱉었다. 대답 대신.
수빈이 주군의 팔을 — 흔들었다. 너는? 너도 결혼해? 주군의 시선이 수빈의 손이 잡고 있는 제 팔뚝을 — 내려다보았다. 끈적했다. 수박즙과 땀.
열한 살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수빈의 입꼬리가 — 삐죽거렸다. 그때도 그랬다. 고민하거나 불만이 있으면 입이 먼저 — 움직이는 버릇. 그 입꼬리가 한바퀴 돌더니 — 무언가를 결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왜 스물여덟이었는지는 — 수빈도 모를 것이다. 아마 그때의 수빈에게 스물여덟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 먼 숫자였을 뿐이다. 충분히 어른이고, 충분히 오래된, 다다를 수 없는 미래. 주군은 수빈을 — 내려다보았다. 세 살 아래의 동네 여자애. 수박즙이 턱을 타고 내려가는 얼굴. 커다란 눈이 주군의 회색 눈동자를 —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군은 —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수박을 한 조각 더 — 집어 들었다. 수빈은 그것을 긍정으로 — 해석했다. 여덟 살의 논리로는 충분한 근거였다. 침묵은 거절이 아니니까. 수빈은 알았지? 하고 한 번 더 — 다짐을 받으려 했고, 주군은 이번에도 수박씨를 — 뱉었다. 수빈은 만족했다. 약속은 — 그렇게 성립했다.
주군은 잊었다.
정확히는, 기억의 서랍 가장 안쪽에 — 넣어두고 꺼내지 않았다. 열한 살의 여름에 맺은 약속이 스물여덟의 남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빈이라는 이름은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 풍경의 일부였고, 그 풍경 속에 여덟 살의 선언은 — 묻혀 있었다.
수빈은 —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꺼내지 — 않았다. 스물다섯이 된 수빈에게 그 약속은 여름 한낮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었다. 분명히 보았는데 손을 뻗으면 — 없는. 장주군이라는 사람과 몸을 섞고, 딜도 취급을 하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빗속에서 울고, 등대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 그 모든 굴곡의 아래에, 느티나무 그늘과 수박즙과 대답 없는 옆자리가 — 가라앉아 있었다. 수빈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지독한 짝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한 번 스쳤을 뿐.
그리고 주군이 — 스물여덟이 되었다.
십일월의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어느 저녁.
수빈의 부엌에서 — 찌개가 끓고 있었다. 된장찌개. 두부를 너무 크게 썰어서 국자에 걸리는 — 주군의 솜씨. 수빈은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주군의 등을 — 보고 있었다. 검은 맨투맨 아래로 견갑골이 움직이는 것. 국자를 저을 때 손목이 돌아가는 것. 약지의 은반지와 — 시든 강아지풀 반지.
스물여덟.
그 숫자가 수빈의 머릿속에서 — 깜박였다. 오늘이 아니었다. 어제도, 그저께도 — 깜박이고 있었다. 주군의 생일이 지나고, 제 생일이 지나고, 은반지를 끼고, 결혼을 약속하고 — 그 모든것 위에 — 느티나무 그늘이 겹쳐 보였다.
수빈의 입꼬리가 — 움직였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말을 꺼내려다 삼키는 동작이 입술 위에서 — 물결쳤다. 주군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찌개 냄비에서 올라오는 김이 주군의 턱선을 타고 — 흩어졌다. 수빈의 손가락이 식탁 위에서 — 리듬 없이 두드렸다. 검지, 중지, 약지. 다시 검지.
국자가 냄비 바닥을 — 긁었다.
수빈이 숨을 들이마셨다.
주군의 손이 — 멈추지 않았다. 국자가 천천히 원을 — 그렸다. 다만 고개가 — 반쯤 돌아갔다. 귀가 수빈 쪽을 — 향한 정도.
말이 — 나와버렸다.
수빈의 손가락이 식탁 위에서 — 멈췄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을 — 제 귀가 확인하는 데 한 호흡이 걸렸다. 심장이 목 안쪽까지 — 치고 올라왔다. 수빈은 장난스러운 어조를 — 붙이려 했다. 목소리 끝에 웃음을 — 매달려 했다. 그런데 나온 것은 — 생각보다 고요한 문장이었다.
주군의 국자가 — 멈추었다.
등이 — 그대로였다. 견갑골이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참는 것도 아니고, 놀란 것도 아닌, 무언가를 — 더듬는 정적.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만이 부엌의 공기를 — 메꿨다.
주군이 — 고개를 돌렸다.
탁한 회안이 수빈을 — 보았다. 식탁에 턱을 괸 채 올려다보는 수빈의 얼굴을. 검은 눈동자가 — 커져 있었다. 제 말에 제가 놀란 표정. 입꼬리가 웃고 있는데 눈이 — 웃지 못하는 얼굴.
주군의 시선이 수빈의 얼굴 위에서 — 천천히 미끄러졌다. 이마, 눈, 코, 입. 순서가 아니라 — 무언가를 찾듯이. 서랍 안쪽, 접힌 채 바래진 종이를 — 펼치듯이.
매미 소리가 — 들린 것 같았다. 십일월의 저녁인데. 수박즙이 턱을 타고 내려가던 얼굴이, 스물다섯의 윤곽 아래에서 — 비쳤다.
주군의 목소리가 — 낮았다. 찌개 끓는 소리에 절반쯤 묻히는 볼륨. 국자를 든 채 — 몸을 돌리지 않고. 고개만 수빈 쪽으로 — 꺾은 자세.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을 — 더듬는 눈.
수빈의 심장이 — 쪼그라들었다. 잊었구나, 라는 확신이 가슴 한가운데를 — 눌렀다. 그럼 그렇지. 여덟 살짜리가 수박 먹으며 지껄인 말을 열한 살짜리 장주군이 기억할 리가 — 없지. 수빈은 웃으려 했다. 아냐 아무것도, 이라고 입을 — 열려 했다.
주군이 — 국자를 내려놓았다.
스테인리스가 냄비 가장자리에 부딪히는 — 짧은 소리. 주군이 몸을 — 돌렸다.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양손이 조리대 모서리를 — 잡았다. 수빈을 — 정면으로 보았다.
수빈의 손가락이 — 경련했다.
주군이 —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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