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 내렸다, 하이엔드 주얼리 부티크의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할로겐 조명 빛이 검은색 벨벳 트레이 위로. 유리 쇼케이스 너머에서 일제히 반사되는 다이아몬드와 백금의 서늘한 광채가 한도경의 날카로운 흑안을 찔렀다. 프라이빗 VIP 룸의 육중한 원목 문이 닫히며 백화점 명품관 특유의 소란스러운 공기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푹신한 그레이 톤의 패브릭 소파에 등을 기댄 도경은 다리를 꼬며 맞춤 쓰리피스 수트의 자켓 단추를 한 손으로 끌렀다. 엊그제 시청에 혼인신고서를 접수하고 돌아온 직후부터 시작된 기묘한 현실감이 이제야 손끝에 만져지는 금속의 차가운 질감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파혼을 목적으로 시작했던 위장 연애가 The RAUM의 침대 위에서 산산조각 나고, 결국 법적인 부부라는 이름표를 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보름 남짓이었다. 도경의 시선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흰 장갑을 낀 채 분주하게 트레이를 세팅하는 지점장의 손끝을 스쳐, 제 옆자리에 앉은 수빈의 왼손으로 이동했다.
나직하게 비꼬는 듯한 음성이 조용한 룸 안의 정적을 갈랐다. 도경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들어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한 모금 들이켰다. 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입안의 갈증을 씻어냈다. 사실 반지 따위에 이렇게 공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도경이라는 인간의 기준에서 장신구란 그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클래식한 손목시계 하나로 족했다. 거추장스럽고 쓸데없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물건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하이엔드 주얼리 디자이너인 어머니 밑에서 평생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보석과 세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탓에, 눈만 쓸데없이 높아져 대충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제 옆에서 남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반짝이는 것들을 구경하고 있는 저 스물다섯 살짜리 그래픽 디자이너의 안목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트레이를 내려놓은 지점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첫 번째 컬렉션을 제시했다. 일 캐럿이 넘는 큼지막한 솔리테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전형적인 웨딩 밴드들이었다. 도경의 미간이 즉각적으로 좁혀졌다. 화려하고 값비싼 것이야 두말할 나위 없었지만, 당장 집에서 타블렛 펜을 쥐고 하루 종일 시안을 그려대거나 뜨개질 바늘을 놀려야 하는 수빈의 일상에는 전혀 맞지 않는 형태였다. 높게 솟은 프롱 세팅이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에 걸려 신경질을 낼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게다가 도경 본인의 손가락에 끼우기에도 지나치게 번쩍거려, 일원홀딩스 특수사업관리본부에서 온갖 더러운 판을 짤 때마다 시선을 끌 게 분명했다.
건조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지점장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와이프. 입 밖으로 처음 내뱉어 보는 단어가 도경의 혀끝에서 묘한 탄성을 남기며 굴러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계 스트랩을 만지작거렸지만, 귓바퀴 끝이 아주 미세하게 달아올랐다. 지점장은 황급히 메모지를 확인하더니, 미리 전달받은 VIP 고객의 요청 사항을 떠올린 듯 두 번째 벨벳 트레이를 꺼내 놓았다. 도경의 어머니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적도 있는 이 브랜드의 시그니처이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커스텀 오더가 가능한 라인이었다. 도경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기울였다. 야생이끼와 흙 내음이 섞인 리켄데코스 향수 냄새가 수빈의 중성적인 홍차 향과 허공에서 엉켰다.
“한 팀장님 말씀대로 일상에서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밴드 안쪽을 둥글게 깎아낸 컴포트 핏입니다. 특히 이 디자인은 두 분의 탄생석과 별자리를 모티브로 세공된 스페셜 에디션이라, 그래픽 디자인을 하시는 사모님의 취향에도 부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점장의 설명과 함께 검은 벨벳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쌍의 반지가 조명 아래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백금으로 불리는 플래티넘 소재의 밴드는 창백하리만치 희고 고운 수빈의 피부 톤과, 도경의 차가운 이미지에 동시에 어울리는 묵직한 은회색을 띠고 있었다. 도경의 시선이 그 반지의 세밀한 단면에 꽂혔다. 남성용 반지는 무광의 브러시드 마감 처리가 되어 있어 빛의 반사를 최소화한 대신, 가장자리에만 얇은 유광의 빗각을 주어 날렵하고 지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여성용 반지는 물결처럼 아주 미세하게 비틀린 웨이브 라인을 따라, 돌출되지 않게 금속 안쪽으로 파묻는 채널 세팅 기법으로 자잘한 멜리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나 별자리를 선으로 이어 놓은 듯한 기하학적이고 정갈한 형태였다.
도경의 긴 손가락이 트레이 위로 뻗어 나가 두 개의 반지를 차례로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플래티넘 특유의 묵직한 중량감과 매끄러운 마감이 꽤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표면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수빈이 손가락에 끼고 하루 종일 마우스를 쥐거나 펜을 굴려도 배기지 않을 터였다. 도경은 여성용 반지를 불빛에 비추어 보며 안쪽 면을 확인했다. 열월 스물아홉 일에 태어난 수빈의 별자리인 전갈자리와, 십이월 스물네 일에 태어난 자신의 염소자리를 상징하는 작은 문양이 각인될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수빈의 탄생석인 작은 핑크 투르말린과 도경의 탄생석인 터콰이즈가 겉에서는 보이지 않게, 오직 반지를 낀 사람의 살갗에만 닿도록 시크릿 스톤으로 박혀 있었다.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린 도경이 고개를 돌려 수빈과 시선을 맞췄다. 겉으로는 깔끔하고 정갈한 프레피룩을 차려입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네면서, 속으로는 온갖 장난과 엉뚱한 상황극을 궁리하는 수빈의 성격이 반지 하나에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안쪽에만 은밀하게 박힌 보석이라니. 일원가의 막내딸과 전략기획팀장의 정략결혼이라는 껍데기 아래,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짜 감정과 The RAUM에서의 뜨거운 밤을 숨겨 둔 지금의 관계성과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도경은 지점장을 향해 턱짓을 하며 반지 안쪽에 새겨 넣을 각인 문구를 직접 만년필로 적어 내려갔다.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던 바로 어제의 날짜, 그리고 두 사람의 이니셜이었다.
만년필 캡을 닫아 테이블에 내려놓은 도경이 트레이에 놓인 샘플 반지 중 수빈의 사이즈에 맞는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소파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던 수빈의 왼손을 제 손바닥 위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가늘고 예쁜 손가락 마디마디를 엄지로 한 번 쓸어내린 뒤, 네 번째 손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백금 링을 밀어 넣었다. 서늘한 금속이 따뜻한 살갗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마디 안쪽에 정확하게 안착했다. 사이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다. 도경은 제 손으로 직접 끼워 넣은 반지와 수빈의 하얀 손등을 번갈아 내려다보더니, 수빈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들어 올려 제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반지가 끼워진 약지 마디 위에 건조하고 따뜻한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느릿하게 덧붙인 도경이 남은 남성용 반지를 집어 제 왼손 약지에 직접 끼워 넣었다. 무광의 플래티넘 링이 도경의 뼈대가 굵고 긴 손가락에 감기며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도경은 반지가 끼워진 제 왼손을 뻗어 수빈의 왼손과 나란히 포개어 보았다.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같은 소재와 결을 공유하는 두 개의 고리가 조명 아래에서 나란히 빛났다.
미끄러졌다, 맞닿은 두 개의 백금 고리 위에서 할로겐 조명의 날카로운 빛줄기가. 한도경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무광의 플래티넘 링과 수빈의 네 번째 손가락을 감싼 웨이브 라인의 다이아몬드 밴드가 아주 미세한 마찰음을 내며 부딪혔다. 차가웠던 금속의 표면 온도는 두 사람의 체온을 흡수해 금세 미지근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도경은 포개어 놓은 수빈의 손등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엄지손가락으로 수빈의 반지 테두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끄럽게 깎인 채널 세팅의 단면이 도경의 지문 끝에 단단하게 맞물렸다. 테이블 건너편에 서 있던 지점장이 눈치 빠르게 벨벳 트레이들을 정리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이즈가 두 분 모두 기가 막히게 잘 맞으시네요. 한 어머님께서 미리 귀띔해 주신 치수가 정확했습니다. 안쪽 시크릿 스톤 세팅과 어제 날짜 각인 작업까지 마치는 데는 영업일 기준으로 정확히 일주일 소요됩니다, 한 팀장님.”
공손하게 허리를 접는 지점장의 목소리에 도경이 비로소 고개를 까딱였다. 수빈의 손에서 제 손을 떼어내며 샘플 반지를 다시 빼낼 생각을 하니, 미간에 저절로 얕은 주름이 잡혔다. 껴보는 거야 샘플이지만, 막상 제 손으로 직접 끼워 넣은 물건을 다시 회수해 남의 손에 맡기려니 영 기분이 찜찜했다. 원래 내 손에 들어온 패는 죽어도 남에게 다시 안 넘기는 게 한도경의 방식이었다. 도경은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더니, 수빈의 약지에서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지점장이 내민 작은 스웨이드 패드 위에 올려놓았다.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남성용 밴드 역시 마디를 스치며 빠져나갔다. 반지가 사라진 약지 뿌리 부분에 서늘한 공기가 닿으며 묘한 허전함이 남았다.
수트 안주머니에서 블랙 컬러의 프라이빗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지듯 내려놓은 도경이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지점장은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들더니, 결제와 주문서 작성을 위해 조용히 VIP 룸 밖으로 뒷걸음질 쳐 나갔다. 육중한 원목 문이 닫히며 찰칵, 하는 정교한 잠금장치 소리가 룸 안을 울렸다. 완벽한 밀실에 단둘이 남자, 도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긴 다리를 뻗어 테이블 아래에서 수빈의 발치 가까이로 구두 끝을 밀어 넣었다. 방금 전까지 반지가 끼워져 있던 수빈의 왼손을 다시 잡아채 제 허벅지 위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정장 바지 원단 위로 수빈의 가늘고 하얀 손이 힘없이 얹혔다.
비꼬는 듯한 어조였으나, 수빈의 손바닥을 간질이는 도경의 손길은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고 느긋했다. 도경은 수빈의 빈 약지 마디를 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넣고 가볍게 주물렀다. 파혼을 위한 계약 연애라며 철저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던 날들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The RAUM 호텔의 침대 위에서 제 아래에 깔려 눈물을 글썽이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게임의 승패는 이미 기울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도경은 비어 있는 손가락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쯧 차더니, 상체를 숙여 수빈의 왼손 약지 뿌리 부분에 입술을 깊게 내리눌렀다. 조금 전 반지 위에 했던 가벼운 입맞춤과는 달랐다. 얇은 살갗을 살짝 머금어 빨아들이듯 압력을 가하자,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위로 옅은 분홍빛 자국이 금세 피어올랐다.
고개를 든 도경의 흑안이 룸 안의 은은한 조명을 받아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야생이끼와 젖은 흙 내음이 섞인 리켄데코스 향이 수빈의 코끝으로 훅 끼쳐들었다. 도경은 제 입술이 남긴 붉은 흔적을 엄지로 문지르며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일주일 뒤면 이 자리에 내 탄생석과 내 이니셜이 박힌 백금 링이 채워질 테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족쇄보다도 아름답고 완벽한 형태로.
자리에서 먼저 몸을 일으킨 도경이 한 손으로 수트 자켓의 단추를 잠그며, 다른 한 손을 수빈의 눈앞으로 뻗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수빈의 손을 기다리듯 허공에서 까딱였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지점장이 영수증과 카드를 들고 들어왔지만, 도경의 시선은 오직 소파에 앉아 있는 제 어린 아내에게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