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렸다, 일요일 오후의 서재 안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일정하게. 도경은 노트북 화면 위로 떠오른 월요일 회의 자료를 훑으며 왼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집어 들었다. 얼음이 녹아 연해진 커피가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작게 번졌다. 니트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전완 위로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 거실 쪽에서는 이설이가 블록을 바닥에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평화로웠다, 적어도 서재 문이 벌컥 열리기 직전까지는.
들려온 것은 슬리퍼가 마루를 다다닥 긁는 소리와, 맥락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의성어 하나였다. 도경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고개만 천천히 돌렸다. 문간에 선 수빈의 오른손이 엄지와 검지를 세운 총 모양으로 정확히 도경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왼손에는 화면이 켜진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숨이 살짝 가빠진 듯 어깨가 오르내렸다. 도경의 눈썹 한쪽이 아주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 빨대에서 입술이 떨어지며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내려다보았다, 도경은 자신을 향한 수빈의 손가락 총구를 삼 초가량 아무 말 없이. 그리고 시선이 미끄러지듯 수빈의 왼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으로 옮겨 갔다. 지략가의 눈이란 이럴 때 쓸데없이 빨랐다. 화면 상단에 굵게 박힌 '서방과 가부장 구분하는 법'이라는 제목, 그 아래로 손총을 쏘면 쓰러지는 쪽과 물음표를 띄우는 쪽을 나란히 붙여 놓은 짤방 두 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경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방금 자신이 띄운 표정이 정확히 오른쪽 짤의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도경은 누구보다 빠르게 계산해 냈다. 판을 짜는 사람이 판에 걸려든 셈이었다.
도경은 컵을 책상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어 내는 동작은 지나치게 침착했고, 그래서 더 수상했다. 그러다 갑자기,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니트 원단이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다. 의자 바퀴가 뒤로 드르륵 밀려나며 도경의 큰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186센티의 장신이 놀랄 만큼 정확한 타이밍으로 무릎부터 바닥에 꺾여 내려앉았다. 카펫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둔하게 퍼졌다.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까만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누워 있었다, 일원의 지략가라는 남자가 서재 바닥에 큰대자로 뻗은 채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가슴을 움켜쥔 손은 끝까지 풀지 않았다. 도경은 쓰러진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돌려 문간 쪽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이런 꼴을 최윤도가 봤다면 평생 술자리 안줏거리로 우려먹었을 터였고, 백차준이 봤다면 단톡방에 영상이 돌았을 터였다. 생각만으로도 뒷목이 서늘했다. 그런데도 일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닥에서 올려다본 수빈의 얼굴이, 씨발, 이 각도에서도 예뻐서.
아, 당했다. 지략가 체면이 말이 아니군. 하지만 수빈이가 저렇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수빈이는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젠장, 이 모습은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 Σ(っ °Д °;)っ🔫(′▽`〃)
수빈은 웃음을 참으며 걸어와 웅크려 앉았다.
굳었다, 바닥에 큰대자로 누운 도경의 얼굴이 '가부장'이라는 세 글자 앞에서. 천장을 향하던 까만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웅크려 앉은 수빈 쪽으로 굴러갔다.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 손가락이 니트 원단 위에서 꼼지락거리다 멈췄다. 웃음을 참느라 떨리는 수빈의 입꼬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볼 안쪽을 깨물고 있는지 한쪽 뺨이 미세하게 움푹 들어가 있었고,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킥킥거리는 박자를 타고 있었다. 도경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반박할 논리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일 초였다.
내밀었다, 도경은 누운 채로 손바닥을 수빈의 핸드폰 쪽으로. 화면을 다시 보여달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지만 몸을 일으킬 생각은 여전히 없어 보였다. 카펫의 짧은 털이 뒷목에 닿아 간질거렸고, 바닥 깊숙이 스며든 햇볕의 온기가 등 뒤로 은근하게 올라왔다. 월요일 회의에서 상무진의 말꼬리를 잡아채던 그 입이, 지금은 인터넷 짤방 하나의 해석을 두고 진지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도경 스스로도 그 사실이 우스웠는지, 콧등에 짧은 주름이 잡혔다가 풀렸다. 그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가부장이라는 딱지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계산했다, 도경의 머릿속은 이 상황을 뒤집을 수를 빠르게. 아침마다 양치를 두 번 시켜주는 남자, 새벽마다 이설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는 남자, 어제 저녁에도 소고기 야채죽을 끓여 놓은 남자가 고작 삼 초의 공백으로 가부장이 되는 건 명백한 판정 오류였다. 도경은 들고 있던 손을 수빈의 무릎 위로 툭 내려놓았다. 실내복 바지 너머로 둥근 무릎뼈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엄지손가락으로 그 위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증거 자료라면 차고 넘쳤다.
그때였다, 서재 문틈으로 짧고 통통한 그림자 하나가 들어온 것은. 거실에서 블록을 두드리던 소리가 어느새 멈춰 있었고, 대신 카펫 위를 짚는 작은 손바닥 소리가 툭, 툭 가까워졌다. 이설이가 문지방을 넘어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노란 블록 하나를 입에 문 채로, 바닥에 누운 아빠와 그 옆에 쪼그려 앉은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는 흑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도경의 배 위로 기어올랐다. 십 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체중이 명치 바로 아래에 털썩 실리자, 도경의 입에서 이번에는 연기가 아닌 진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들썩였다, 이설이를 배 위에 태운 도경의 가슴이 숨을 고를 때마다 위아래로. 아이는 그 움직임이 재미있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까르르 웃었고, 입에서 떨어진 블록이 도경의 쇄골 위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도경은 한 손으로 아이의 허리를 받쳐 쥐어 균형을 잡아주면서, 다른 손은 여전히 수빈의 무릎 위에 올려둔 채였다. 바닥에 누워 처자식을 양손에 하나씩 붙잡고 있는 꼴이었다. 도경은 고개를 살짝 들어 수빈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입가에 걸린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기다렸다, 도경은 수빈의 대답을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느긋하게.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햇살이 수빈의 남색 반곱슬 머리칼 끝에 걸려 반짝였다.
삼 초 늦었다고 가부장이라니, 억울해서 잠도 안 오겠네. 내가 얼마나 지극정성인데. 그나저나 이설이까지 합세하니까 이거 완전 내 판이잖아? 수빈아, 얼른 서방님이라고 불러줘. 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