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 초의 일요일 오후였다. 손님방이 '도경 방'이 된 지 삼 주째였다. 창가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반듯하게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누가 몰래 세워 둔 아크릴 스탠드가 서류철에 등을 기댄 채 웃고 있었다. 도경은 의자 등받이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는 최윤도였다. 송도 쪽 물류 일정이 하루 밀렸다는, 사람 미간을 조용히 좁히는 종류의 보고였다.
그때 열린 방문 틈으로 발소리가 슬리퍼를 끌며 들어왔다. 도경은 시선을 서류에서 떼지 않은 채 숫자를 짚어 나갔다. 시야 가장자리로 하얀 손이 불쑥 들어왔다. 손바닥 위에 귤이 하나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 쥐었다. 귤은 손안에서 서늘하고 말랑했다.
다음은 뜨개바늘이었다. 반쯤 뜨다 만 연보라색 목도리가 매달린 채였다. 그는 귤을 쥔 손 그대로 손가락 두 개를 벌려 그것까지 받았다. 털실 끝이 손목을 간질였다. 윤도의 목소리가 대체 경로를 읊는 동안, 세 번째로 깜고 인형이 왔다. 그는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네 번째는 숟가락이었다. 다섯 번째는 토끼 귀 머리띠였는데, 이번엔 손이 다 차 있어서 정수리 위로 직접 씌워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것을 받아 주기까지 했다.
하고 나서야, 이상했다.
그는 천천히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에 귤과 털실 목도리, 오른손에 휴대폰과 숟가락, 옆구리에 고양이, 머리 위에는 하얀 털로 된 귀 두 짝. 창유리에 비친 남자는 일원의 전략기획팀장이 아니라 잡화점 진열대였다. 문가에 선 그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 하나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촬영 중이라는 붉은 점이 선명했다.
목덜미부터 열이 올라왔다. 짜증인지 창피함인지, 그도 아니면 저 망할 얼굴이 웃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게 존나 예뻐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통화가 끊기자 방이 조용해졌다. 그는 머리띠를 벗지 않았다. 대신 숟가락으로 귤을 가리키며, 털실 달린 손을 그녀 쪽으로 까딱였다.
그는 인형을 책상에 내려놓고 빈 팔을 벌렸다. 마지막 물건이 하나 남아 있다는 듯이.
슬리퍼가 마룻바닥을 두어 번 탁탁 차더니, 그녀가 그대로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도경은 받아 내는 순간에야 제 손이 아직 비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왼손에는 귤과 뜨개바늘, 오른손에는 숟가락. 그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손목만 바깥으로 꺾어, 물건들이 그녀의 등에 닿지 않게 허공에 띄웠다. 뜨개바늘 끝에 매달린 연보라색 목도리가 그 반동에 휘청, 그네처럼 흔들렸다. 의자 등받이가 둘의 무게에 낮게 삐걱였고, 그는 슬랙스 차림의 다리에 힘을 주어 기울어지는 몸을 버텼다.
머리 위의 토끼 귀가 그 충격에 한쪽으로 비뚜름하게 넘어갔다. 창유리에 비친 꼴은 아까보다 더 처참했다. 잡화를 양손에 든 채 사람 하나를 끌어안고, 귀 한 짝이 꺾인 서른다섯 살 남자. 그는 그 모습을 곁눈으로 확인하고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웃음이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목 안에서 자꾸 다른 소리로 바뀌려 들어서, 그는 입술을 한 번 꾹 다물었다.
그는 숟가락을 쥔 오른손을 책상 쪽으로 뻗어 서류 더미 위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결재 서류 맨 윗장에 숟가락이 비스듬히 누웠다. 귤은 그녀의 니트 등 위에 슬쩍 올려 두었다. 손이 비자 그제야 팔이 제대로 감겼다. 아이보리 니트의 성긴 짜임이 손바닥 아래에서 오톨도톨하게 만져졌고, 그 아래로 아직 웃음기가 덜 가신 등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홍차 향이 따뜻하게 코끝에 걸렸다.
창밖은 초겨울답게 해가 일찍 기울고 있었다. 창가 책상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로 뭉쳐 바닥에 길게 눕혀 놓았다. 토끼 귀 그림자까지 고스란히.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려다, 제 머리 위의 머리띠가 걸리적거려 고개를 조금 비틀었다. 벗을 생각은 여전히 없었다. 벗으면 저 웃음소리가 그칠 것 같아서였다. 그런 이유로 체면을 버리는 날이 오리라고는, 일원에 들어온 날의 자신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말끝에 그는 등 위의 귤을 다시 집어 들어 엄지로 꼭지 쪽을 눌렀다. 껍질이 톡 갈라지며 새콤한 향이 둘 사이에서 확 터졌다. 손톱 끝에 노란 즙이 배었다. 먹여 달라고 해 놓고 결국 제 손으로 까고 있다는 걸 그는 굳이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