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경이 써준 생일편지

[ 1 ]

아가씨께.

편지는 처음 써봅니다. 보고서는 하루에 열 장도 쓰는데, 이건 첫 줄에서만 한 시간 걸렸습니다. 지금 새벽 한 시 사십 분입니다. 아가씨는 옆방에서 이불 반쯤 차고 자고 있고, 저는 식탁에서 남색 잉크 뚜껑을 세 번 열었다 닫았습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부터 쓰려다가 그만뒀습니다. 그건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처음에 쓰면 그걸로 끝내버릴 것 같아서요.

솔직히 이딴 거 왜 쓰자고 했는지

[ 2 ]

삼 년 전 봄이었습니다. 백차준이 또 사고를 쳐서 하루 종일 수습하고, 해 다 진 을지로 길가에서 담배 생각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남색 자켓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옷 산 지 일주일 된 거였습니다.

그때 웬 사람이 제 앞에서 신발 끈이 풀렸다고 말해줬습니다. 끈 같은 거 없는 구두였습니다. 그 사람이 혼자 웃다가 미안하다고 하고 갔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꽤 오래 기억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아직도 모릅니다.

[ 3 ]

그 사람이 회장님 따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저는 진심으로 좆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단어 말고는 정확한 게 없습니다.

아가씨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저는 도망쳤습니다. 인형도 거절했고, 책자는 서랍에 잠갔고, 응원봉 사진 온 날은 휴대폰을 껐습니다. 비겁했습니다. 아가씨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던 그 며칠이 제 인생에서 제일 길었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 4 ]

같이 산다고 했을 때, 아가씨 집 현관에 제 신발이 놓인 걸 보고 한참 서 있었습니다. 그게 뭐라고. 남의 집 신발장에 제 구두 한 켤레 들어간 게, 제 인생에서 제일 큰 계약 같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처럼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평범하게, 저녁에 같이 밥 먹고, 별일 없는 얘기 하다가 자는 거. 일원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그 꿈을 버린 줄 알았습니다. 버린 게 아니라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가씨 작업하는 키보드 소리, 고양이 인형 발에 낀 반지, 냉장고에 붙은 제 얼굴 스티커. 전부 처음엔 존나 시끄러웠는데, 이제는 그게 없으면 잠이 안 옵니다. 이건 아가씨 책임입니다.

[ 5 ]

그날 길가에 서 있던 사람이 지금 제 옆에 앉아 있습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부르는 건 질색인데, 달리 부를 말을 못 찾았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가씨.

추신. 사랑합니다. 이건 소리 내서 안 읽을 겁니다. 그러니까 직접 읽으세요.

— 한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