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거실 통창을 넘어 회색 패브릭 소파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공기 중에는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금빛으로 유영하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라벨도 붙지 않은 채 비워진 정체불명의 작은 유리병 하나가 덩그러니 굴러다녔다. 백차준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숙취 해소제라며 기어코 입에 털어 넣은 뒤로, 도경의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늘 서늘하게 벼려져 있던 이성의 끈이 누군가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맥없이 툭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때 현관 도어락이 짧은 전자음을 내며 열리고, 실내로 익숙한 홍차 향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도경의 까만 눈동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느릿하게 굴러갔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시선이 그녀의 실루엣을 포착하자마자, 동공이 눈에 띄게 확 풀리며 초점을 잃은 듯 아련해졌다. 평소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챙겨 주거나 어디 갔다 이제 오냐며 틱틱거렸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귓가에는 자신의 심장이 둔탁하게 뛰는 소리와 함께, 평생 스스로의 입으로 뱉어본 적 없는 기괴하고도 원초적인 충동만이 웅웅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씨발, 이게 무슨 기분이지. 왜 이렇게 서럽지.
혼자 거실에 남겨졌던 고작 십여 분의 시간이 마치 십 년처럼 아득하고 외롭게 느껴졌다. 왜 나를 두고 나갔어, 왜 이제야 와, 빨리 나 안아줘, 쓰다듬어줘. 평소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무의식 밑바닥의 유치한 욕망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턱끝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도경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양팔을 허공에 붕 띄워 그녀를 향해 뻗었다. 매끄럽고 창백한 뺨 위로 옅은 홍조가 번지고, 늘 비꼬듯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어린아이처럼 삐죽하게 아래로 처졌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평소의 낮고 건조한 톤과 달리 끝이 축축하게 갈라지며 콧소리가 잔뜩 섞여 있었다. 그는 뻗은 두 팔을 허공에서 붕붕 흔들며 재촉하더니, 그녀가 채 다가오기도 전에 참지 못하고 소파에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왔다. 값비싼 캐시미어 니트와 슬랙스 무릎이 러그에 쓸리며 사각거리는 마찰음을 냈지만, 깔끔 떨던 평소와 달리 먼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도경은 성큼성큼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 언저리를 두 팔로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롱스커트 원단 위로 자신의 매끈한 볼을 강아지처럼 부벼대기 시작했다. 곱게 넘겨져 있던 흑발이 와르르 무너지며 이마를 덮었고,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깊고 뜨거운 숨결이 치맛자락을 적셨다.
자신이 무슨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뇌의 절반은 경악하고 있었으나, 입술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멈추질 않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채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한껏 물기가 어린 눈망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찾아 허공을 더듬거리더니, 기어코 손끝을 붙잡아 자신의 정수리 위로 턱 얹어놓았다. 어서 쓰다듬으라는 듯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손바닥에 스스로 비벼대는 꼴이, 영락없이 주인에게 간식을 조르는 대형견 그 자체였다.
수빈은 그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도경을 끌어안고 쪽. 쪽. 쪽.
이마와 콧잔등, 그리고 매끄러운 뺨 위로 연달아 내려앉는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다정한 체온이 쏟아져 내렸다. 거실의 서늘한 공기를 밀어내듯 확 끼쳐오는 짙은 홍차 향기가 도경의 호흡기를 빈틈없이 채웠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예뻐', '너밖에 없어', '사랑해'라는 세 마디의 단어가 고막을 때리는 순간, 그의 까만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가 이내 촛불에 녹아내리는 밀랍처럼 사르르 휘어졌다. 평소라면 귀 간지럽게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헛기침을 하거나 비꼬는 농담으로 받아쳤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의 이성이라는 회로가 완전히 타버린 상태였고, 오직 그녀가 주는 무차별적인 애정만이 온몸의 신경세포를 찌릿하게 달구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존나 좋아서 심장 터질 것 같아.
도경의 창백하고 고운 피부 위로 순식간에 복숭앗빛 열기가 확 번져 올라왔다. 귓바퀴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그는 목구멍 끝에서 터져 나오려는 흐물흐물한 신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주책없이 귀밑까지 끌어올렸다. 그녀의 작은 품에 폭 안긴 건장한 상체가 기분 좋은 전율에 부르르 떨렸다. 슬랙스 무릎이 러그 위에서 한 번 더 바스락거리며 미끄러졌고, 그녀의 허리를 감아쥐고 있던 두 팔에는 한층 더 집요하고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마치 제 몸을 그녀의 옷감 속으로 아예 우겨넣으려는 듯,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랫배와 가슴팍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좌우로 거칠게 부벼댔다.
니트 자락에 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물기가 흥건하게 배어 나와 끝이 달콤하게 휘어졌다. 그는 고개를 다시 번쩍 들어 올리더니, 아예 눈을 두 질끈 감고 자신의 매끈한 왼쪽 뺨과 붉은 입술을 그녀의 얼굴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와중에도 입술을 삐죽 내밀고 대기하는 모양새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도경은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꼬옥 쥐고 흔들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아예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싼 채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186센티미터의 거구가 고작 스물다섯 살짜리 아가씨에게 매달려 뒷걸음질로 소파까지 질질 끌고 가는 진풍경이 거실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도경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턱을 턱 하니 괴고, 귓가에 자신의 달아오른 볼을 찰싹 밀착시킨 채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은반지가 끼워진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찾아 깍지를 얽어매더니,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손바닥 안쪽을 잘게 간지럽혔다.
협박이라고 내뱉는 말투에는 위압감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오로지 관심을 갈구하는 응석만이 가득했다. 그는 그녀를 소파 앞까지 몰고 가서는, 어서 앉으라는 듯 자신의 붉어진 눈가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옷소매를 잘게 잡아당겼다.
오후의 햇살이 거실 바닥을 가로질러 테이블 위 빈 유리병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비추었다. 소파 앞까지 그녀를 어기적거리며 끌고 와 옷소매를 잘게 잡아당기던 도경의 손끝이, 마치 보이지 않는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순간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달콤하고 분홍빛이던 안개가 누군가 환기창을 활짝 열어젖힌 듯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서늘하고 날 선 이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흐릿하게 풀려 있던 그의 까만 눈동자가 급격하게 수축하며 원래의 선명하고도 예리한 초점을 되찾았다. 귓가에 웅웅거리던 자신의 마지막 대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생생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나 우는 거 보고 싶어요? ...씨발, 지금 누가 우는 걸 보고 싶대? 내가?
일원홀딩스 특수사업관리본부 전략기획팀장 한도경. 서른다섯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철옹성 같은 자존심이 방금 전의 기괴한 콧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 바닥을 굴렀다.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치맛자락에 볼을 비비던 감촉, 손가락이 아프니 호 해달라며 혀 짧은 소리를 내던 주둥이, 심지어 뽀뽀 오십 번을 채워달라며 얼굴을 들이밀던 꼬라지까지. 단 1초의 누락도 없이 UHD 고화질 영상으로 뇌리에 재생되는 기억에 도경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아 올랐다.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그의 상체가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천천히, 아주 뻣뻣하게 뒤로 물러났다.
창백하고 매끄러운 그의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의 발그레한 도화빛이 싹 가시는가 싶더니, 이내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인해 목덜미부터 귓바퀴 끝까지 시뻘건 열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가락과 얽혀 있던 은반지 낀 손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져 나갔으나, 차마 완전히 놓지는 못하고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갈 곳을 잃은 채 부르르 경련했다. 도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파르르 떨리는 동공으로 눈앞의 그녀와 테이블 위의 빈 유리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백차준. 그 미친 새끼가 숙취 해소제라며 쥐여준 그 수상쩍은 액체가 원흉임이 틀림없었다.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평소의 낮고 건조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끝에 숨길 수 없는 미세한 떨림과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내뱉으며 흐트러진 흑발을 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 올렸다. 어떻게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평소처럼 능글맞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려 애썼지만 붉게 타오르는 귓불과 삐죽거리는 입꼬리가 그의 처절한 노력을 가차 없이 배신하고 있었다. 도경은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해 시선을 거실 바닥으로 뚝 떨어뜨린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틀어막고 낮게 신음했다.
변명이라고 늘어놓는 말투가 평소답지 않게 다급하고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입으로는 약물 탓을 하면서도, 방금 그녀가 제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며 '예뻐, 너밖에 없어, 사랑해'라고 속삭여주던 그 황홀한 감각만은 여전히 피부 위에 생생하게 남아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려대고 있었다. 수치스러워서 당장이라도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와중에, 무릎베개를 결국 못 받고 약 기운이 깨버렸다는 사실이 은근히 아쉬워 죽겠다는 모순적인 본심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국 완벽하게 포커페이스를 되찾는 데 실패한 도경은 귀끝까지 시뻘게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반쯤 가린 채, 뒷걸음질로 소파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평소처럼 까칠한 척 거들먹거리려 했지만, 슬그머니 소파 옆자리를 툭툭 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여전히 어리광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