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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발견했다, 도경이 수빈의 작업실 책상 위에서 그 노트를 펼쳐진 채로. 일요일 오후, 수목원에서 돌아와 이설이를 재운 뒤였다. 수빈은 거실 소파에서 가디건을 덮고 선잠에 들어 있었고, 도경은 그녀가 찾던 태블릿 펜을 가지러 들어온 참이었다. 연보라색 커버의 스프링 노트는 펜꽂이 옆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맨 위에 적힌 영문 제목이 먼저 눈에 걸렸고, 그 아래 둥글고 빠른 수빈의 글씨가 빼곡했다.

'THINGS THAT MAKE YOU HAPPY. 이게 뭐야.'

도경은 펜을 쥔 채로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읽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이 한 박자 늦게 왔고, 그 사이 눈은 이미 첫 줄을 지나 있었다. 01과 02는 채워져 있었고, 03부터는 제목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도경은 거실 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려 기척을 살핀 뒤, 수빈의 연필꽂이에서 검은 펜 하나를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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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NGS THAT MAKE YOU HAPPY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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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s Observation

♡ 01. SMALL PLEASURES (소소한 행복)

  • 아이스 아메리카노. 겨울에도 얼음 꽉꽉. 이거 없으면 아침에 말수 절반으로 줄어듦. ↳ 절반 아님. 3분의 1. 정확하게 써요.
  • 비 오기 직전 흐린 날 좋아하는 듯? 창밖 오래 봄. ↳ 그건 날씨 보는 게 아니라 빨래 걷을지 계산하는 거예요. 근데 싫진 않음.
  • 조용한 거. 이설이 낮잠 자고 집 조용해지면 어깨가 내려감 ㅋㅋ ↳ ……이걸 봤어? 언제.
  • 익힌 파인애플 극혐. 하와이안 피자 시켰을 때 표정 기록용으로 사진 찍어둠. ↳ 지워요. 당장.
  • 리켄데코스 향. 출근 전에 손목에 두 번, 목에 한 번. ↳ 세는 사람이 어딨어요. 맞긴 한데.

♡ 02. PERSONAL JOY (개인적 즐거움)

  • 요리. 특히 내가 맛있다고 하면 무표정인데 귀 끝 빨개짐!! ↳ 안 빨개짐. 조명 탓.
  • 회장님(아빠) 칭찬 들은 날. 집에 오는 발소리부터 다름. ↳ 이건 인정. 근데 장인어른한테는 말하지 마요. 절대.
  • 서재 책장 정리. 책 높이 맞춰 꽂고 혼자 뿌듯해함. ↳ 높이 아니고 출판사별. 공주님은 관찰력이 반만 좋아.
  • 윤도 형님이랑 통화할 때 욕 섞어서 웃음. ↳ 형님은 원래 욕 섞어야 대화가 돼요.
  • 내가 쓴 글 제일 먼저 읽는 거?? (아닐 수도) ↳ 물음표 빼요.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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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의 마지막 줄 앞에서 펜이 오래 멈췄다. 잉크가 종이에 작게 번져 점 하나가 생겼다. 도경은 그 점을 내려다보다가 물음표 두 개 위에 짧게 줄을 그었다. 줄은 곧았고, 손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빈칸으로 남은 03이 그 아래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도경은 펜 뚜껑을 입에 문 채로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남이 써놓은 숙제에 답 다는 꼴이네. 씨발, 근데 틀린 걸 그냥 두면 저 사람 계속 오해할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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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경'S TURN

♡ 03. SHARED HAPPINESS (수빈과 함께하는 행복)

  • 아침에 양치 두 번 시켜주는 거. 귀찮다고 입 벌리고 기다리는 얼굴 보는 게 하루 시작임.
  • 내가 요리할 때 주방 들어와서 간 보겠다고 알짱거리는 거. 방해되는데 안 오면 기다림.
  • 같이 장 보러 가서 수빈 씨가 쓸데없는 거 카트에 몰래 넣는 거 모르는 척하기.

펜이 다시 움직였다, 03의 세 번째 줄 아래로 조금 더 빠르게. 처음 세 줄을 쓸 때만 해도 단어를 고르느라 끝이 자주 멈췄지만, 네 번째 줄부터는 손목이 먼저 앞서 나갔다. 수빈의 둥근 글씨 옆에서 도경의 글씨는 각이 지고 기울어 있었다. 획 끝마다 힘을 빼지 못해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눌려 들어갔다. 작업실 창으로 들어온 늦은 오후의 볕이 노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잉크가 마르는 속도를 늦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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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파에서 수빈 씨가 내 허벅지 베고 누워서 아무 말 없이 휴대폰 보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게 제일 좋음.
  • 밤에 이설이 재우고 나왔을 때 침대에서 기다리다 잠든 얼굴. 약속 지켜서 메일 안 본 날은 더.
  •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설이가 처음 아빠 했을 때. 그리고 그 옆에서 나보다 먼저 울던 당신 얼굴. 둘 다 1등이라 못 고름.

♡ 04. SECRET PLEASURES (숨겨진 행복)

  • 수빈 씨 홍차 향수 병, 화장대에서 가끔 뚜껑만 열어봄. 출장 갔을 때 한정.
  • 당신이 한팀장님 하고 화낼 때. 화난 건 아는데 그 호칭이 좀 좋음. 반성 중.
  • 휴대폰 사진첩 즐겨찾기 폴더 이름 '업무자료'. 안에 전부 수빈 씨랑 이설이. 열지 마요.
  •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9층 버튼 누를 때. 그 3초가 하루 중 제일 기다려짐.
  • 당신이 작업 끝내고 화면 돌려서 여보 이거 봐봐 할 때. 사실 미리 기대하고 있음.

♡ 05. HAPPINESS RANKING (행복 순위)

  1. 수빈 씨가 웃는 거. 이유 필요 없음. 그냥 1위.
  2. 셋이 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설이가 우리 사이에서 먼저 잠드는 순간. 숨소리 두 개 듣고 있으면 다른 게 다 조용해짐.
  3. 내가 만든 밥을 수빈 씨가 남기지 않았을 때. 어제처럼 반 공기만 먹으면 순위 밖.
  4. 회장님이 고생했다 하실 때. 근데 집에 와서 당신한테 자랑하는 게 더 좋으니까 사실 이것도 수빈 씨 덕.
  5. 아직 안 왔는데 벌써 들어간 거. 둘째 얼굴 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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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AL NOTE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음. 아버지처럼 퇴근하고, 어머니 같은 사람이랑 밥 먹고.

근데 당신은 평범하지가 않아서 계획이 다 틀어졌음.

틀어진 게 더 좋다는 걸 매일 확인하는 중.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그거 당신 이름이랑 거의 같은 뜻이라고 쓰겠음.

관찰은 이제 그만하고,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요. 다 대답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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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도경은 한동안 펜을 내려놓지 못했다. 펜 뚜껑에 남은 잇자국을 엄지로 문지르며 그는 방금 쓴 페이지를 위에서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04의 세 번째 줄에서 시선이 멈췄고, 목덜미가 천천히 달아올랐다. 창백한 피부 위로 번지는 붉은 기는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 그는 그 줄에 줄을 그으려고 펜을 들었다가, 반쯤 내려간 손을 허공에서 거두었다.

'미쳤지, 진짜. 남의 노트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근데 지우면 그게 더 쪽팔리잖아.'

거실에서 가디건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경은 반사적으로 노트를 덮었다가, 이어지는 고른 숨소리를 듣고 어깨를 내렸다. 수빈은 여전히 소파 팔걸이에 뺨을 묻은 채였다. 이설이의 방문 틈으로는 작은 무드등 불빛만 새어 나왔다. 집 안은 냉장고 모터 소리와 벽시계 초침 소리만 남을 만큼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도경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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