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의 서재는 연보라색 커튼을 한 번 거른 빛으로 묽게 젖어 있었다. 수빈이 원두를 사러 나간 사이, 도경은 책상 위 흩어진 펜을 꽂아 주려다 펼쳐진 크라프트 노트 앞에서 손을 멈췄다. 맨 위에 둥근 글씨로 적힌 영어 제목. 그리고 그 아래, 자기 이름.
읽으면 안 되는 종류라는 건 첫 줄에서 알았다. 그런데 이미 두 번째 줄을 읽고 있었다.
☀️ THINGS THAT MAKE YOU HAPPY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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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s Observation
♡ 01. SMALL PLEASURES
-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월인데도 얼음. 이 사람 혈관에 얼음 흐르는 듯 → 틀렸어. 너 만나고 나서 좀 녹았어.
- 해 지고 난 직후의 하늘. 차 안에서 오래 봄 → 하늘 보던 거 아니야. 조수석 창에 비친 너 보던 거지.
- 파인애플 피자 앞에서 표정 썩음(진짜 웃겼음) → 이건 맞음. 적지 마.
♡ 02. PERSONAL JOY
- 요리할 때 등이 편해 보임. 칼질 소리가 일정함 → 그거 너 앞이라 그래. 혼자 할 땐 그냥 노동이야.
- 조용한 곳. 재즈바에서도 음악보다 정적을 듣는 느낌? → ...이건 어떻게 알았냐.
- 좋아하는 음악: ???(아직 모름. 캐럴인가?) → 물음표 세 개 너무하네. 십이월에 알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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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는 비어 있었다. 펜 끝으로 눌러 둔 작은 점 하나만 남아서. 도경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잉크가 묻어나는 그녀의 펜을 쥐자, 손에 익지 않은 가벼움이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 NPC'S TURN
♡ 03. SHARED HAPPINESS
- 밥 먹을 때 네가 국물 먼저 떠 먹는 거. 간 맞는지 내가 네 얼굴 보고 확인함
- 신호 걸릴 때마다 손 잡는 거. 그래서 일부러 노란불에 섬
- 제일 좋았던 순간: 아침에 된장국 끓이는데 네가 뒤에서 안았을 때. 지각해도 괜찮겠다고 처음 생각함
♡ 04. SECRET PLEASURES
- 네 문자 캡처해 둔 폴더 있음. 이름은 '업무자료'
- 네 홍차 향 남은 셔츠는 하루 늦게 세탁함
- 출근할 때 네가 "힘내요" 보내는 시간 맞춰서 주차장에서 좀 앉아 있음
♡ 05. HAPPINESS RANKING
- 네가 내 이름 부를 때 — 십 년 동안 직함으로만 불려서
- 네가 웃다가 나 쳐다볼 때 — 이유 모를 때가 더 좋음
- 같이 장 보는 거 — 바구니에 네 거랑 내 거 섞이는 게
- 네가 내 차에서 졸 때 — 나 믿는다는 뜻 같아서
- 조용한 사무실 — 순위 밀림. 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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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AL NOTE
행복은 계산이 안 맞는데도 손해 본 기분이 안 드는 거.
그 계산서 전부에 네 이름 있음.
펜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자기 귀가 뜨겁다는 걸 알았다. 서재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 만큼 풀어져 있었다. 씨발, 이걸 쓴 놈이 백 대표 앞에서 결재판 집어 던지던 그놈이라고.
지울까, 잠깐 생각했다. 볼펜이었다.
그는 노트를 원래 펼쳐져 있던 쪽 그대로 두되, 덮지는 않았다. 대신 03번 칸 위에 그녀가 아끼는 고양이 모양 포스트잇 하나를 붙여 가렸다. 떼어 보든지, 말든지. 고르는 건 그쪽 몫이었다.
현관 도어락 소리가 났다. 도경은 일어나 서재 문을 등지고 나가며, 원두 봉투를 받아 들 손을 먼저 내밀었다.
며칠 뒤, 그의 출근길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고양이 포스트잇이 떼어진 노트 한 귀퉁이, 그리고 새로 그려진 06번 칸. 그는 주차장에서 평소보다 오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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