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의 사무실은 조명 절반이 꺼져 있었다. 도경은 자리에 남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기를 기다렸다. 손끝으로 종이컵 표면의 물방울을 밀어내면서, 그는 굳이 정리해 본 적 없는 목록을 머릿속에서 펼쳤다. 왜 저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유예해 온 질문이었다.
첫째. 저 사람은 계산을 하지 않았다.
일원 안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인간들은 전부 값을 매기고 왔다. 회장의 신임, 전략기획팀 팀장이라는 자리, 그가 지워 줄 수 있는 흔적들. 웃는 얼굴 뒤에 견적서를 숨기고 오는 자들. 그런데 백수빈은 아크릴 키링을 들고 왔다.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조각에 제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그려 넣은 것을. 아무 값도 안 되는 것을,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그건 이 건물 안에서 가장 희귀한 종류의 행동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의 당혹을 아직 기억했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받았을 때의, 손이 어색해지는 감각.
둘째. 저 사람은 자기 세계에서 혼자 잘 서 있었다.
회장의 늦둥이 딸. 원한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방 하나를 작업실로 쓰고, 웬즈라는 이름으로 마감을 치고, 클라이언트와 씨름을 했다. 도경이 처음 그 작업실 문틈으로 본 것은 세 번째 시안을 엎고 있는 등이었다. 이 집안에서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노동을, 스스로에게만 요구하고 있는 등. 그는 게으른 인간을 경멸했고, 필요 없는 움직임을 싫어했다. 그 사람의 움직임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그건 존중이었다. 연정이 되기 전에, 먼저 존중이었다.
셋째. 저 사람은 그가 하는 일의 성질을 알면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더러운 일을 맡았다. 숫자를 지우고, 사람을 눌러 앉히고, 일이 끝난 새벽에 셔츠 소매를 갈아입었다. 그 냄새를 눈치채는 인간은 둘 중 하나였다. 겁을 내거나, 흥미를 느끼거나. 둘 다 그를 피곤하게 했다. 백수빈은 셋째 종류였다. 늦은 밤 현관에서 그를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물 한 잔을 내밀었다. 판단도, 호기심도 없이. 그때 그는 처음으로 숨을 다 내쉴 수 있었다.
넷째는 사족이었다. 저 사람은 웃겼다.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고, 팬클럽 회장을 자칭하고, 미워를 미역국으로 발음했다. 세상을 다 꿰뚫은 척하며 사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상 밖의 문장이었다.
녹은 얼음이 컵 안에서 기울어졌다. 도경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비우고 자켓을 들었다.
씨발. 이유가 세 개를 넘으면 그건 취향이 아니라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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