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두꺼운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거실 바닥에 칼날 같은 빛줄기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S급 전용관 특유의 완벽한 방음 설비 덕분에 바깥세상의 소음은 먼지 한 톨조차 스며들지 못했고, 실내를 채운 것은 오직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는 공조기의 낮고 웅웅거리는 기계음뿐이었다.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은 홍예준은, 테이블 위에 하얀 융을 깔아두고 제 분신과도 같은 권총을 분해해 놓은 참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특유의 시큼하고 차가운 윤활유 냄새가 평소 그가 애용하는 박하 담배의 잔향, 그리고 방 안 곳곳에 배어든 웬즈의 중성적인 홍차 향과 기묘하게 뒤섞여 코점막을 자극했다. 그는 얇은 면봉으로 공이치기 주변의 미세한 화약 그을음을 닦아내며, 평소보다 한결 이완된 눈매로 부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침실 쪽에서부터 다급하고 가벼운 발소리가 타다닥, 하고 마룻바닥을 때리며 가까워지더니, 시야 앞을 가로막으며 작은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고개를 미처 다 들기도 전에 고막을 찌르는 경쾌하고도 당찬 외침이 거실의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빵야. 그 황당무계한 두 글자가 공기를 가르는 순간, 홍예준의 손끝에 들려 있던 쇳조각이 딱 멈췄다. 그는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찌푸린 채,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쉬 블론드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안광 없는 하늘색 눈동자가, 제 코앞에 당당하게 내밀어진 조그맣고 하얀 손가락 총구와 그 너머에서 반짝이는 웬즈의 검은 눈동자를 차례대로 훑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심장 언저리를 정조준하고 있는 그 앙증맞은 손 모양에, 일순간 그의 뇌 회로가 기분 좋은 정지 상태에 빠졌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전술적 데이터가 스쳐 지나가는 대신,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먼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아크의 긴급 제압팀 에이스이자 전직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앞에서, 맨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입으로 격발음을 내는 센티넬이라니. 심지어 검지 끝은 수평도 맞지 않고 살짝 위로 들려 있었으며, 엄지손가락은 방아쇠가 아니라 공이치기 역할을 하듯 까딱거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저런 뜬금없는 짓을 하는 건지 이유를 추론해 보려다가도, 잔뜩 기대에 찬 채 제 반응을 살피는 저 동그란 눈망울을 보자마자 모든 이성적인 사고가 증발해 버렸다. 아, 진짜. 귀여워서 사람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예전의 그였다면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고 한숨이나 푹 내쉬었겠지만, 지금 그의 가슴팍 안쪽은 총알보다 더 치명적인 무언가에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간지럽고 뻐근하게 울리고 있었다.
낮고 건조하게 깔린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총열 부품을 테이블 위 융 위에 달그락,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특유의 시니컬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가부장처럼 물음표를 띄우며 멀뚱히 쳐다보는 것도, 그렇다고 다짜고짜 쓰러져 주는 것도 그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격에 있어서만큼은, 상대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라 할지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직업병이 발동한 참이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상체를 앞으로 훅 기울였다. 소파 쿠션이 푹 꺼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홍예준은 뻗어 나온 웬즈의 작은 손을 제 크고 단단한 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었다. 총을 쥐느라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이 그녀의 보드라운 손등에 닿자마자, 피부 밑으로 기분 좋은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마치 사격 훈련장에서 일대일 교습이라도 하듯,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손목 각도를 살짝 비틀어 제 왼쪽 가슴, 정확히 심장이 뛰고 있는 위치에 똑바로 조준선을 맞춰주었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맥박이 톡, 톡, 하고 빠르게 뛰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턱짓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키는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다정함과 흥미가 짙게 서려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이상한 걸 보고 와서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그녀가 시작한 이 유치하고 귀여운 역할극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원하는 반응이 무엇이든 그 이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에 가까웠다. 오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세상을 단숨에 부수고 들어온 여자다. 이미 오래전에 심장 한가운데를 꿰뚫려 완벽하게 제압당한 마당에, 고작 손가락 총알 한 발쯤 더 맞아주는 게 대수랴.
그는 웬즈의 손가락 총구가 제 셔츠 옷감에 닿을 만큼 바짝 다가앉은 채, 아예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려 완벽한 무방비 상태를 만들어 보였다. 느슨하게 풀린 검은색 반팔 셔츠 사이로 드러난 쇄골과 단단한 가슴팍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러고는 못 말린다는 듯 픽 웃음을 흘리며, 아까보다 한 톤 더 낮아진 목소리로 뻔뻔하게 덧붙였다.
말을 마친 홍예준은 웬즈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려, 그녀의 가는 허리춤을 느슨하게 휘감았다. 언제든 방아쇠가 당겨지기만 하면, 우스꽝스럽게 혼자 쓰러지는 대신 그녀를 통째로 끌어안고 저 푹신한 소파 위로 함께 나뒹굴 준비를 마친 완벽한 포식자의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