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 장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인쇄된 질문 아래 빈칸이 줄지어 있었고, 은재는 볼펜 뚜껑을 이로 문 채 첫 줄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잉크가 번진 검지 옆면이 종이 귀퉁이에 닿을 때마다, 그는 괜히 손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첫 번째 질문 옆, 그는 동그라미 대신 짧게 적었다.
1.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고 싶은 계획이 있습니까?
1. 없음. 지금은.
'지금은'을 덧붙이고 나서 펜 끝이 잠시 멈췄다. 지울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A. 이유 있음. 내가 받은 거 없이 컸으니까, 줄 게 있는지 모르겠음. 돈 얘기만은 아님. 어릴 때 집이 어떤 공기였는지 나는 기억하는데, 그걸 똑같이 물려줄까 봐 무서움. 애가 나처럼 복도에서 혼자 뛰는 꿈 꾸는 거, 그거 상상만 해도 싫음. 그리고 솔직히, 나 아직 나 하나 키우는 중임.
그는 마지막 문장을 적고 볼펜을 한 번 딸깍였다. 얇은 종이 너머로 식탁의 결이 비쳐 보였다. 쓰고 나니 생각보다 덜 창피했다.
B. 타협 함. 무조건. 쟤가 원하면 같이 고민할 거고, 같이 공부할 거임. 입양이든 뭐든. 근데 그 전에 내가 먼저 괜찮은 어른이 돼 있어야 함. 그래서 '싫다'가 아니라 '아직'임. 시간 좀 달라고 할 거임. 도망은 안 감. 약속했음.
'약속했음' 아래로 펜이 두 번 지나가 밑줄이 그어졌다. 꾹 눌러 쓴 자국이 종이 뒷면까지 도드라졌다.
C. 의향 있음. 고양이 좋음. 근데 걔 햇빛 싫어하고 시끄러운 거 싫어하니까, 조용한 애로. 털 날리면 내가 치움. 취미는 걔가 하는 거 옆에서 배울 거임. 뜨개질 이런 거. 손가락 굵어서 못 할 수도 있는데 해 볼 거임. 보드게임은 지금도 맨날 짐.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비틀려 올라갔다. 볼펜을 쥔 손등 위로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D. 각오. 늙어서도 걔한테 기대기만 하는 놈은 되기 싫음. 지금은 내가 받는 게 훨씬 많은데, 그 저울 언젠가는 맞추고 싶음. 돈 모을 거임. 많이는 못 해도. 그리고 걔 아프면 내가 옆에 있을 거임. 그건 돈 없어도 할 수 있으니까.
E. 바라는 거.
이 칸 앞에서 그는 가장 오래 머물렀다. 펜 끝이 허공에서 작은 원을 몇 번 그리다 내려앉았다.
목요일마다 산책. 손잡고. 둘 다 걸음 느려져도 상관없음. 아침에 좋은 아침 소리 듣기. 매일. 하루도 빼먹지 말기. 커피는 그때쯤이면 내가 더 잘 내릴 거임. 그리고 걔가 내 이름 부르는 거, 늙어서도 계속 듣고 싶음. 은재야, 하고. 그거면 됨. 진짜로.
그는 볼펜을 내려놓고 종이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다시 읽어 보니 맞춤법도 엉망이고 글씨도 삐뚤었다. 그래도 접지 않았다. 대신 맨 아래 여백에 아주 작게 한 줄을 더 적었다.
추신. '아직'이 언젠가 바뀌면, 그때 이 종이 다시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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