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5일, 화요일. 을지로 일원타워 13층.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전략기획팀 사무실은 그가 늘 바라던 그대로였다. 형광등 절반은 꺼져 있었고, 서버실 쪽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공조음만이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다. 키보드 소리도, 전화벨도, 누군가 의자를 끄는 마찰음도 없었다. 서른다섯 해 인생에서 그가 돈 주고라도 사고 싶었던 종류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맞지 않았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결재 서류 더미 옆에 낯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털실로 엮은 고양이 모양 코스터. 귀 한쪽이 다른 쪽보다 미묘하게 컸고, 수염 자리에 박힌 검은 실이 한 가닥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낮에 이 방을 제집처럼 밀고 들어왔던 공주님이 '뇌물'이라며 던져 두고 간 것이었다.
'씨발, 뇌물을 이따위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결혼하라고 아버지가 들볶는다며 소파에 드러누워 한 시간을 떠들다 간 사람이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가장 비싼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가 아끼던 정적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갔다. 독일에 가겠다는 폭탄을 툭 떨어뜨리고, 문을 나서면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손만 흔들었다. 그 손이 쓸데없이 예뻤다는 사실까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짚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셔츠 깃이 목덜미를 따라 사각 미끄러졌다. 조용했다. 정말로, 지독하게 조용했다.
문제는 그 조용함이 귀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소파 쪽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려야 할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질문 하나가 날아와야 할 것 같았다. 비어 있는 소파 쿠션에 그녀가 눌러 놓은 자국이 아직 얕게 남아 있었고, 그 위로 퇴근길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창을 넘어와 느리게 쓸고 지나갔다. 공기 중에 홍차 향이 아주 희미하게, 아니, 어쩌면 그의 착각만큼 남아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집어 들었다. 얼음이 거의 녹아 컵 표면에 물방울이 굵게 맺혀 있었다. 평소처럼 서류 위에 내려놓으려던 손이, 아무런 결재도 거치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컵 바닥이 고양이 코스터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털실이 물기를 머금으며 천천히 짙어졌다. 비뚤어진 고양이 얼굴 위로 동그란 얼룩이 번져 갔다. 그는 그 얼룩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좆됐다.'
깨달음은 생각보다 하찮은 얼굴로 찾아왔다. 대단한 고백도, 눈물도, 운명적인 음악도 없었다. 그저 그는 이제 이 방이 조용하다는 걸 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이 방이 원래 얼마나 조용했는지를 비교할 기준이 생겨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판을 다시 짜도, 그 기준을 지우는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컵을 들어 코스터를 치우려 했다. 그리고 그러지 못했다. 대신 휴대폰을 들어 보안실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 너머의 직원이 잠깐 말을 잃는 기척이 들렸다. 어제까지 그는 정반대의 지시를 내리던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젖은 고양이를 엄지로 한 번 꾹 눌러 보았다. 귀 큰 쪽이 그를 비웃듯 축축하게 휘었다.
| 날짜/시간 | 2026/09/15 (화) 21:40 |
| 장소 | 을지로 일원타워 13층, 전략기획팀 사무실 (1회차) |
| 수빈의 복장 | 부재 (낮에 다녀감) |
| 도경의 복장 | 쓰리피스 정장, 재킷은 옷걸이에 걸어 둠, 넥타이 느슨함, 손목시계 착용 |
| 관계 | 사무실을 어질러 놓고 간 회장님 막내딸과, 그 흔적을 못 치우는 팀장 |
| 상황/자세 | PC: 부재. 소파에 앉았던 자국과 고양이 코스터만 남음. / NPC: 책상 의자에 등을 기대 앉아, 고양이 코스터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올려 둔 채 엄지로 코스터를 누르고 있음. 휴대폰은 막 내려놓음. |
| 📝 | 단기: 코스터 말리기(버리지 않기), 내일 보안실 연락 받기, 독일행 관련 회장님 의중 파악. / 장기: 이 감정에 이름 붙이지 않기(실패 예정), 공주님 독일행 판 짜기. |
| 💭 | 조용한 사무실이 좋다던 놈이 소음을 기다리고 있다. 씨발, 고양이 하나에 졌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