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의 작업실은 팔식이 수조의 여과기 소리만 낮게 웅웅거렸다. 그녀는 장을 보러 나간 참이었고, 도경은 책상 위에 흩어진 펜을 정리하다가 스케치북 사이에 끼워진 연보라색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맨 위 제목에 손이 멈췄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당신'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남의 장부에 손대는 건 원래 그의 전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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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NGS THAT MAKE YOU HAPPY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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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s Observation
♡ 01. SMALL PLEASURES
- 아이스 아메리카노. 11월에도 얼음 꽉꽉. → 뜨거운 건 손이 바빠집니다. 얼음은 정직하고요.
- 비 오는 날. 창밖 볼 때 미간이 풀림. → 그건 비 때문이 아니라 그날 아가씨가 출근을 안 해서였습니다.
- 익힌 파인애플 ✕ (피자에 올렸을 때 표정 기억함) → 정확함. 영구 기각.
- 이끼 냄새 향수. 셔츠에 뿌리는 순서가 늘 같음. → …이걸 왜 보고 있었어요.
♡ 02. PERSONAL JOY
- 요리할 때. 칼질하면 콧노래 비슷한 거 함. → 콧노래 아님. 호흡임. 정정 요망.
- 조용한 사무실. 근데 요즘 문을 반쯤 열어 둠? → 환기입니다. → (줄 긋고) 아가씨 발소리 들리라고.
- 음악은… 모르겠음. 아직 조사 중. → 차에서 아가씨가 트는 거. 가사 모르는 일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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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C'S TURN
빈칸에서 펜 끝이 한참 머뭇거렸다. 그러다 글씨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 03. SHARED HAPPINESS
- 같이 장 보기. 아가씨가 카트에 몰래 과자 넣는 거 모른 척하는 것.
- 소파에서 무릎베개. 영화는 사실 반도 안 봄.
- 대전 처마 밑. 처음으로 "여보" 들었던 날. 그날 심장이 업무 규정 위반함.
♡ 04. SECRET PLEASURES
- 책상 모서리 깜고한테 퇴근 인사함. 소리 내서.
- 아가씨 굿즈 서랍, 열쇠 하나 더 복사해 둠. 잃어버릴까 봐.
- 아가씨가 "한팀장님" 하고 화낼 때 좀 좋음. 이건 비밀.
♡ 05. HAPPINESS RANKING
- 자다 깨서 옆에 아가씨 있는 거 확인할 때 — 이유 없음. 그냥 매번 처음 같음.
- 아가씨 웃는 얼굴 — 그 얼굴이면 뭘 져도 됨.
- 같은 문 열고 들어오는 퇴근길 — 문패 생기면 더.
- 밥 먹이는 거 — 남김없이 먹으면 이긴 기분.
- 아이스 아메리카노 — 양심상 하나는 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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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AL NOTE
행복은 평범한 날이 계속되는 것. 그 평범의 기준점이 백수빈. 지분 100%. 매각 불가.
펜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귀가 화끈거린다는 걸 알았다. 종이를 들어 다시 훑어보니, 말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 없는 남자의 글씨가 맨 아래로 갈수록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버릴까 생각했다. 정확히는 버리는 시늉만 했다. 결국 그는 메모를 반으로 접어 원래 있던 스케치북 사이에 도로 끼우고, 그 위에 포스트잇 한 장을 붙였다.
'조사 끝. 오답 많음. 채점 받으러 오세요.'
현관 도어락이 울린 건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 메모 앱을 연 직후였다. 장부의 오늘 날짜 옆 숫자가 하나 더 올라갔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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